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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3. 19:45

 

 


독립열사 유관순, 그 짧고도 강인했던 생애

 

 

오는 8월 15일은 69주년 광복절입니다. 광복절이 금요일이라 금, 토, 일 삼일간의 달콤한 연휴를 즐길 생각에 벌써부터 들떠있으신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공휴일이니 즐겨야한다는 생각보다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된 독립열사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광복절의 참된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오늘은 광복절을 맞아 우리나라의 광복과 독립을 제창하다 희생당한 고귀한 독립운동가인,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은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 출생, 그리고 이화학당


이화학당 재학시절의 유관순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한국의 잔다르크, 유관순(柳寬順) 선생. 그녀는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梯) 사이에서 태어난 유관순 선생은 5남매 중 둘째 딸이었어요. 아버지인 유중권 선생은 계몽운동자로,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위해 교회를 세우기도 하고, 한말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興湖)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었지요. 이러한 민족주의자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유관순 선생도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심과 함께 민족의식을 키워나갔습니다. 특히 1910년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 속에서 민족의 처지를 깨닫게 된 유관순 선생은 강한 신념과 애국심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과 국권회복에의 열정을 키우기 시작했죠.

 

 

이미지 출처 : http://www.cheonan.go.kr/

  

그러던 중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5년 봄 이화학당에 편입하게 됩니다. 선생의 나이 13살.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행복하기만 한 날들이었어요.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서 선진학문을 배우며, 먼저 입학한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선후배들과 어울리며 여느 또래 아이들과 같이 성장하는 듯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조국과 민족에 대한 고뇌와 사랑은 계속되었는데요, 선생은 “나는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며 기도하기도 했다고 해요.

 

 

 

 

 

2) 독립운동의 전개



유관순 선생이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고 있을 무렵, 우리 민족 사이에서는 독립운동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민족자결주의 원칙’ 때문이었어요.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천명한 것으로,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국민들은 이 기회에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독립운동을 계획하게 됩니다. 중국 상해의 신한청년당과 일본 동경의 조선유학생향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었고, 국내에서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된 사회단체들 대신 종교계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추진되었어요. 천도교와 기독교, 그리고 각 학교에서 따로 추진되었던 독립운동 계획은 천도교 측의 연합 제안으로, 교단과 종파를 초월하여 민족대연합전선으로 구축되게 됩니다. 이 연합을 통해 민족대표가 선정되고 거사일과 역할 분담 등이 결정되었습니다. 또 후에 불교계와 다른 학생들까지도 동참하면서 독립운동 계획은 더욱 탄탄한 진행되었지요.

  

 

   

3.1운동을 준비하는 민족대표 33인과 3.1독립선언서

 


일본 동경의 조선유학생향우회의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서’를 통해 일제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한일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였습니다. 또한 식민지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며,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지요. 2·8독립선언은 일본의 저지로 실패했지만, 3·1운동 계획을 본격화 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어요. 3·1독립선언서는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어 민족대표들의 긴 협의를 거친 끝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후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2만 1천여 매를 몰래 인쇄하며 3·1운동을 준비하게 됩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집결한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이후 2시 30분경,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수 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하게 됩니다. 이 날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어요.

 

 

 

 

 

 

3) 독립운동을 추진한 유관순


이미지 출처 :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9963​


이 같은 3·1운동의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 조직인 이문회를 통해 알고 있던 유관순 선생은, 3·1운동 발발 바로 전날 학당 내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3월 1일, 만류하는 선생님을 뒤로한 채 학교의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합니다. 그날 이후 3월 5일 서울에서 전개된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면서 항일 독립의지를 다졌어요.

 

이 같이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시위의 추진 기지가 되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임시휴교령을 내렸습니다. 학교가 문을 닫자 유관순 선생은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뒤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고 계획을 밟아 나갔습니다. 고향 유지들과 함께 4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천안뿐만 아니라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에도 연락기관을 두어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드디어 4월 1일, 선생은 장터에서 밤새 직접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정오가 되자 군중 앞에서 열변을 토해내며 독립운동의 투지를 불태웠습니다. 18세 어린 여학생의 뜨거운 연설은 모인 군중들의 애국심과 울분을 한껏 끌어올렸고, 이어진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 유관순 선생을 필두로 한 3천 여 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4) 최후까지 '대한독립만세'

 


시위가 격렬해지자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일본 군인들이 몰려들어와 총검으로 시위 참여자들을 학살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어요. 유관순 선생의 아버지인 유중권 선생은 이런 학살에 대항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했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 달려든 선생의 모친인 이소제 선생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관순 선생은 부친의 시신을 둘러메고 만세운동 주도자들과 함께 군중들을 이끄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막대한 병력을 투입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며 시위 참가자들을 해산시킨 뒤, 그 날 저녁 유관순 선생과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cheonan.go.kr/


유관순 선생은 이곳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며,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했습니다. 그리고 공주 감옥으로 이송될 때 지켜보는 군중들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연이어 외치며 독립의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소리치며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아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면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그곳에서 더 심한 강도의 고문을 받게 됩니다. 

 



선생이 받았던 고문은 현재까지도 가장 악랄하게 치부되는 일제의 고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그 모습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습니다. 기록된 고문 내용만 해도 펜치로 손발톱을 강제로 뽑고, 위에 호스를 연결시켜 뜨거운 물과 칼날 등을 집어넣고, 그림에 보이는 것 같이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나무 상자에 긴 대못을 박아놓고 3일간 가둬놓는 등 잔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우리 유관순 열사는 민족적인 기개를 잃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였습니다. 선생의 나이 18세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인내심과 애국심이었습니다.

 

선생은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징역 3년을 받게 되어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유관순 선생은 서대문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의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어요.

 

 

 

1920년 9월 28일, 결국 유관순 선생은 지나친 고문으로 인해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 -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75년 8월 15일 광복 3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무후선열제단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후손이 없거나 유해마저 찾을 길이 없는 133위 순국선열의 위패를 봉안하는 곳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이 모든 평화와 자유가 온전히 우리의 것이고 즐겨야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의 18세는 꽃다웠고 배불렀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아름답고 앳됐던 유관순 열사의 18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번 69주년 광복절에는 가족모두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후손들에게 대한민국을 돌려주신 애국선열지사에 대한 존경심을 되새기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번 일로 확실히 알았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맨손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를 겁내어 총과 칼로 법석을 떨었습니다.  

여러분, 조선의 해방이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다 함께 일어나십시오.

 하느님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블로그 기자 안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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